조정 임진란 기록 지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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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유적명
조정 임진란 기록
문화유적지정번호
제1003호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향토문화유적종류
보물
소재지도로명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경천로 684
소재지지번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삼덕리 361
지정일자
1989-05-23
소유주체구분
국유
규모
7책
조성시대
조선시대
향토문화유적소개
조정(趙靖, 1555-1636)선생의 자는 안중(安仲), 호는 검간(黔澗)이며 본관은 풍양이다. 임란에 창의하여 국토수호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상주.함창은 물론 경상도, 충청도 지역의 의병 및 관료들의 활동, 백성들의 동향과 교통상, 왜적의 갖가지 만행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상주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 일기의 내용은, 1592년(임진) 4월 14일 일본군의 제1진 1만 8천명은 고니시를 대장으로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향해 북진하였다. 그 달 19일에는 왜군 제2진 2만 2천명이 가또오를 대장으로 하여 부산에 상륙하고 신령 방면으로 북진하였고, 같은 날 제3진 1만 1천명이 구로다를 대장으로 하여 김해 죽도에서 상륙하고 김해성 및 창원, 영산(靈山), 창녕을 점령하고, 한 패(우종대:右從隊)는 무계(茂溪) 성주를 거쳐 25일에 개령 금산(金山)에 당도하니 이 고장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다른 한 패(좌종대:左從隊)는 창녕에서 갈리어 초계(草溪) 합천 거창 지례(知禮)를 거쳐 금산에 당도하여 우종대와 합류하고, 금산(지금의 김천시 삼락동)에서 대열을 가다듬고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려 하였다. 제3진에 뒤를 이어 제4진 1만 4천명 가운데 모리가 일대를 이끌고 금산에 들어와 제3진고 합류했는데 당시 이 지방(금산)에는 1만 5천의 왜군이 진을 치고 3일간을 머물고 있었다. 4월 28일에는, 방어사 조경, 조방장 양사준, 돌격장 정기룡, 비장 장지현 등이 방위하는 추풍령을 돌파하고 북진하였다. 5월초에는 왜군 제6진이 1만 5천명이 고바야가와를 대장으로 제3진의 뒤를 이어 금산에 머물다가 곧 선산으로 옮아갔고, 금산에는 제6진의 일부인 2천 5백명(대장 다찌바나)과 또 다른 9백여 명이 왜군이 남아 있었다. 6월 12일에는 왜군 제7진 3만명을 이끌고 모오리가 대장으로 상주에 잠시 머물었다가 개령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개령의 왜군 진지는 지금의 개령면 동부동을 중심으로 주위 3km에 걸쳐 2중 목책으로 둘러싸고 목책 사이와 바깥에는 깊은 참호를 파서 아군의 공략을 막았다. 금산과 선산에 머물러 있던 제6진 1만 5천의 고바야가와군은 원래 전라도 점령을 목적으로 한 부대로서 상륙하고 창원에 머물면서 남원을 거쳐 전라도로 침입하려다가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군에게 길이 막혀 성주를 거쳐 금산으로 들어 온 것이다. 금산 선산 성주 지례 등지에 흩어져 머물고 있으면서 전라도 침입을 노리고 있다가, 부대를 둘로 나누어 7월 10일에 1대는 지례를 거쳐 거창으로 가다가 우두령(牛頭嶺:김천시 대덕면과 거창군 웅양면 사이 고개)에서 의병대장 김면에게 패하여 금산으로 퇴각하였고, 1대는 무주를 거쳐 금산(錦山)에서 전주로 향하다가 도절제사 권율에게 패하고 도주한 왜졸은 금산에서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무주를 거쳐 지례에 당도한 고바야가와의 왜군을, 이 고장 충신 의병대장 여대로, 의병장 권응성, 김해부사 서예원, 중위장 황응남 등 의병에게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7월에서 9월에 걸쳐 개령에는 제3진과 3만군과 제6진 1만군의 4만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이를 본거지로 선산·성주·금산·지례·무주 등지에 출몰하면서 앞서 말한 추풍령전투, 우두령전투, 지례전투, 상좌원전투 등 규모 큰 전투 외에도 상좌원 하로(賀老)·부상고개(扶桑峴)등지에서 소규모 전투는 끊일 날이 없었다. 개령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듬 해 2월 12일 명나라 원군이 들어와 평양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면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기까지 수시로 이 고장의 산간벽지까지 출몰하여 납치 방화 약탈 강간 등 가진 횡포를 부렸으며, 특히 그들에게 잡혀 욕보기에 앞서 자결하여 정절을 지킨 부녀들이 이 고장에만도 수 없이 많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 14만이 재침했는데, 모오리를 대장, 가또오를 선봉장으로 한 5만군병의 소속 일부 부대가 9월 18일 성주를 거쳐 금산에 들어왔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보다 난폭하고 무자비하여 들 곡식에까지 불을 지르고 산골짜기에까지 찾아다니며 사람을 해치곤 했다. 봉계
관리기관전화번호
054-537-6753
관리기관명
상주박물관
데이터기준일자
2024-12-10
제공기관코드
5,110,000
제공기관명
경상북도 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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