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38세 때 이 고장에 들어와 여생을 지낸 곳으로, 우복동천이라고도 한다. 선생이 선조와 인조 때 성실하게 활동한 것을 치하하여 영조가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하사하여 1602년 대산루를 짓고 1603년 별서 기능을 가진 계정을 지었으며 그의 고손자인 주원은 영조가 하사한 사패지에 종택을 지었다. 5대손인 정주원 때부터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자리하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튼 口자형으로 배치된, 종택으로써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남지방의 반가이다. 튼 ㅁ자로 배치된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가묘가 남아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부엌·안방·윗방·대청·상방으로 구성되었고, 사랑채는 一자형 구조로 사랑방·대청·건넌방이 배열되어 있다. 집 몸채의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잡고 있어 특이하다. 대산루는 마을 하천을 건너면 널찍한 대지 위에 잡석으로 축대를 낮게 쌓고 자연석 주초에 원기둥의 팔작 기와집으로 단층에 연결하여 2층 누각을 세운 T자형 건물이다. 단층집은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남편 2칸은 대청이며 내동주가 없고, 북편 2칸은 방이며 퇴마루로 통해서 돌계단을 누각으로 오르게 했다. 누각은 천장 높이의 2층에 온돌 장치를 한 방 1칸과 마루방(서실) 2칸의 대청을 놓았다. 대청 마루 한족 벽에 우곡잡영 이십절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내용은 서실, 오봉당, 오노대, 산영담 등 부근 20절경을 예찬한 시구이다.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 누마루에 서서 동남 쪽 앞을 내다보면 바로 앞에는 낙동강의 상류인 우산천이 흐르고 멀리는 겹겹 산봉이 사방으로 아늑히 둘러 싸여 별세임은 깨닫게 된다. 누상에는 정동교가 쓴 <대산루>란 초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곧 이 누각을 비롯한 부속건물 일체를 통칭하고 있다. 이 누각은 조선시대에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 하층은 부엌 장치를 하고 상층은 온돌방으로 만든 점이다. 이러한 양식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누각 동편에 계정(溪亭)이 있는데 1603년에 세운 창간정의 별명이다. 이곳에 200여 m 떨어진 서편 산 대지에 도존당(道存堂)이 있다. 이 당은 처음 향인들이 서당으로 세운 것을 점차 증축하여 뒤에 우산서원으로 승격하고 우복을 봉향하다가 대원군 때 훼철되어 현재 건물만 남았다. 이 유서 깊은 건물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심히 퇴락 되었는데 1978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상주시가 유적을 보수 정화하였다. 한마디로, 대산루와 계정은 우복선생이 개창한 선비의 독서처요 강학당으로 조선후기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선생에 이르기까지 영남의 강학소로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