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벼루와 벼루집은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 1318∼1398)의 유물로 벼루의 뒷면에 ‘김선치 년십이(金先致 年十二)’라 음각하고 수결(手決)하여 이는 고려 충숙왕 16(1329)년에 해당된다. 그 후 4백여 년이 지난 뒤 1762년(영조 38)에 예곡(禮谷, 문경시 신흥동)의 이연원(李延元) 우물에서 발견되자 동래의 김덕장(金德章)이 가져갔다. 그 후 덕장이 죽자 동생 현장이 수소문 끝에 14세손 담(湛)을 찾아 전해 주었다. 담은 문경현감 김재악(金載岳, 재위 1764. 6∼ 1768. 12)에게 보여주니 ‘기이하다’하여 특별히 1768년 9월에 벼루집을 제작해 주었다. 벼루집은 목질이나 양식이 당대의 것으로 인증된다. 특히, 고산석(高山石)인 이 벼루는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이를 두고 조선시대 당시의 문사(文士) 30여 명이 기(記)·시(詩)·가(歌)·행(行) 등으로 연기(硯記) 즉, ‘낙성군 선조 고연운(洛城君 先祖 古硯韻)’을 남겨 그 정신 문화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하겠다. 선생은 본관이 상산(商山)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판종부시사 록(祿)의 아들이며, 포은 정몽주의 스승인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의 아우로 문무를 겸한 고려 충신이다. 여말 홍건적의 난 때 큰 공을 세웠으며, 김득제(金得齊)와 더불어 세칭 3원수(三元帥)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