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가옥은 우복선생의 6대손인 입제(立劑) 정종로(鄭宗魯)(1738년∼1816년) 선생의 아우인 재노(宰魯 1775년생) 공이 15세 때 주거용으로 1770년(영조 46년)년에 건축하였으나 현재는 사랑채만 남았으며 안채는 80년 전에 개축하고 별채(현 병천정 현판이 있는 집)는 70년 전에 개축한 것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고 가옥이 20여 동이나 있으나 병암만 민속자료로 지정 받았다. 고택은 자연석 기단과 주초에 각주를 사용하고 벽체는 흙으로 사벽 처리하였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놓고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로 동자주(童子柱)를 사용하였다. 병암의 평면구성은 부엌이 고방으로 바뀌었을 뿐 남쪽지방의 주택의 안채와 꼭 같은 방 배열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특이한 것이라 한다. 병천정이란 현판이 있는데 이는 정동두(鄭東斗)가 1840년경에 우산고개 계곡에 전면 5간, 측면 2간의 정자를 짓고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멋진 곳이었으나 1982년에 허물고 현판만 이 곳에 보관하였다. 또한, 지붕 안에 양각한 현판의 병암은 소유자인 정재하(鄭在夏)의 증조부인 진사 정철우(鄭喆愚)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